튀코 브라헤 Tycho Brahe, 1546 ~ 1601
주요 저서로는 [신성에 관하여], [최신 천체 운동론] 이 있으며 하늘을 뒤덮고 있는 투명한 껍질을 벗긴 천문학자입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21세의 나이에 독일에 있는 로스토크 대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 중에 자신의 8촌 친척인 페르스버그와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코를 잃었습니다. 이후로 평생 동안 금속 보형물로 제작된 코를 붙이고 살았습니다. 당시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2세의 지원을 받아 벤섬에 천문연구소를 만들었으며 16세기 말 유럽에서 최고의 관측 천문학자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1572년에는 신성의 발견, 1577년에는 혜성의 관측을 통해 천상계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고대 이래 내려져 온 천동설적 이론에 균열을 초래했습니다.
튀코 브라헤의 생애
그렇다면 튀코 브라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튀코 브라헤는 1546년 12월 14일 덴마크의 풍족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천문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혁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1543년에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펴내며 지동설을 주장하였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동안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천동설의 잔재가 곳곳에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튀코 브라헤는 자녀가 없었던 작은 아버지에 의해 원치않은 입양을 제외하고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덴마크 귀족 가문의 아이들과 비슷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유년 시절은 귀족답게도 라틴어, 펜싱, 승마 등을 배우는 등 부족함이 없었고 유복했습니다. 집안의 희망사항인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코페하겐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때가 13세의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튀코 브라헤는 법학자나 변호사의 길보다는 하늘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더 컸습니다. 바로 이듬해 14세인 1560년 어느 날, 일식(日蝕)을 관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천문학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됩니다. 천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결국 법을 그만두고 156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1566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와 로스토크 대학교 등 독일 곳곳에 있는 대학교로 유학 생활을 하며 천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유달리 밝게 빛나는 별을 찾다
1572년 11월 11일 천문학자로서 유럽 대륙에 튀코 브라헤가 그 이름을 알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초신성의 발견입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습관적으로 하늘의 별을 관측하던 그는 문득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다른 별들과는 다르게 밝게 빛나고 있는 별을 발견했습니다. 직감적으로 예전부터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별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별은 대략 1년 정도 같은 자리에 머물렀고, 밝을 때는 금성보다 빛났던 것입니다. 이때의 관측을 이듬해 1573년 [신성에 관하여 (De nova stella)] 라는 라틴어 책을 출간했습니다.
[신성에 관하여 (De nova stella)]
제1부: 본인의 신성 발견에 대한 간단하게 경위를 전개
제2부: 신성의 위치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 신성의 위치는 처음 출현한 이후로 같은 자리에 계속 있었음을 강조
제3부: 지구에서 신성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고 이를 항성 천구에 할당
제4부: 신성의 크기, 밝기, 색상을 설명
마지막 부분: 이 현상의 천문학적 의미를 설명
즉, 튀코 브라헤가 Nova Stella 신성이라고 부른 것은 달 위의 세계라고 하는 천상계에 존재한다는 것, 이를 확대해서 해석해보자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변하지 않는 법칙이라고 믿어져 왔었던 천상계라는 것이 사실은 변화가 가능한 부분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천구에 대한 신념에 종말을 알리다
1572년 초신성의 발견은 덴마크의 당시 국왕이던 프레데릭 2세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당대의 동서양 권력자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프레데릭 2세 역시 천문학과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튀코 브라헤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리하여 1575년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벤섬을 튀코 브라헤에게 하사함은 물론 왕실 천문학자 직위를 제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1576년 튀코 브라헤는 벤섬으로 이사를 와서 우라니엔보르 천문대, 스티에르네보르 관측소 등 천문 관측에 필요한 여러 시설들을 만들고 명성을 높이게 됩니다. 1598년 지동설과 천동설을 절충해서 본인만의 이론을 제시한 것이 [최신 천체 운동론]입니다. 이는 행성들이 태양의 둘레를 돌며 태양은 달과 함께 가만히 있는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는 체계입니다. 누군가는 튀코 브라헤가 코페르니쿠스를 추종했다면서도 일정 부분 천동설을 인정한 것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사실은 튀코 브라헤의 우수한 관측 천문학의 결정체이자 결과인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